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자연과학대학 지구환경과학부 해양환경전공으로 학사를 취득하고
일반대학원 해양학과에서 석사를 취득한 뒤
동 대학원에서 박사 수료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미 박사는 수료하고도 1년도 넘게 지난 상태였지.
다행히 새로운 대학에서는 대학원 편입 전형이 있어서
처음부터 과정을 새로 밟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전적대학에서의 학점이 24학점까지만 인정되기 때문에
나머지 12학점을 1년간 다시 들어야 한다.
수료를 해당 대학에서 다시 해야한다는 소리다.
여하튼 이러한 연유로 이사를 해야했는데,
혼자 살기도 하고, 시골집으로 우선 다 옮겨두면 되지 않을까 싶어
따로 이삿짐 센터를 부르진 않았다.
(하지만 이건 나를 포함한 모두의 큰 착각이었다. 진짜 힘들었다.)
내 차가 조금 큰 편이긴 해서 왕창 실을 수 있긴 한데,
워낙 잡다한 물건이 많은지라 차곡차곡 담기가 힘들었다.
책도 좀 많은 편이고, 전자기기 및 부속품들이 상당히 많다.
모니터도 두 대나 되고, 카메라도 보통 사람들보다 많아서
옮길 때 부서지거나 고장나진 않을까 심히 걱정스러웠다.
광주 집에서 시골집까지는 거리가 약 50km로,
그리 멀지 않은 편이었다.
퇴근 후 학교에서 시골집까지 40분 정도 걸린다.
워낙 집에서도 일을 하는 편인지라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이 컴퓨터 작업 환경 마련이었다.
그래야 뭐든 하지.
시골집에서 출퇴근을 한지 3일차가 되었음에도
짐을 다 옮기지 못 한 상황이다.
너-무 많아...
매일 광주 집과 연구실에서 짐을 챙겨오느라
시골집에 도착하면 뻗기 일쑤였다.
날도 덥고 짐은 많고 조심은 해야겠고
그와중에 발목 수술한 부분이 가끔 쑤시기도 하고.
여전히 후유증이 있는데, 아마 평생 갈 듯하다.
짐 옮길 때 보통 종이박스나 단뿌라박스를 이용하지만,
나는 따로 사는 게 낭비이기도 하고
어차피 차로 한 번씩 옮기는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구매하진 않았다.
그래서 집에 있는 리빙박스를 계속 활용했다.
이거 없었으면 진짜 뭐든 하나 사야했을 듯.
그리고 이사를 마친 현재(2024.11.)도 리빙박스는 열심히 쓰고 있다.
그와중에 며칠째 목에 근육통 같은 통증이 있다 못 해 심해지고 있어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봤는데 좀 심각했다.
지금은 괜찮은 편이지만, 이때엔 겉으로도 붓기도 했고
목 안에 염증이 꽤 많이, 그리고 크게 자리잡은 상태였다.
그래서 직접 주사기 바늘을 찔러서 세포검사도 진행을 했고,
초음파 촬영까지 다 해봤다.
아무래도 삶이 고단한갑다.
아픈 와중에도 짐은 꾸준히 옮겨야했다.
어차피 누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도 모두 인천과 서울에 있으니까.
그냥 내가 할 일이니까.
그래도 한 번에 옮기는 양은 좀 줄이도록 노력했다.
더 무리하면 진짜 큰일날 것 같은 몸상태였으니까.
가끔 시골집엔 동네 고양이가 찾아오는데(엄마 왈 '냐미'),
사실 이녀석 외에도 한 마리 더 있다.
얘는 좀 예쁘게 생긴 편이고, 다른 한 마리는 정말 얼굴이 크고 못생겨서
동네 1짱 + 쾌남 고양이라는 게 느껴진다.
책상은 데스커의 800x600mm 기본책상 두 개를 갖고 있었는데,
얘네는 다리 분리가 정말 간단하다.
그런데도 튼튼하니 정말 수년간 애용하는 중이다.
책상 크기가 크지 않아서 분리한 뒤에 차 트렁크에 넣어도
공간이 아주아주 여유로웠다.
좀만 더 큰 걸 샀다면 약간 난감했을지도.
그런데 이제는 좀 더 큰 게 필요하긴 하다.
이불은 그나마 쉽게 옮길 수 있었다.
봉투가 대따시만한 게 있었거든.
역시 쟁여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혼자 사는 주제에 이불은 또 세 셋트가 갖고 있었기에
한 번에 옮기기엔 무게가 장난 아니었다.
엘레베이터 두어 번 와리가리 칠 수 밖에 없었다.
침대는 옮기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내 침대는 보통 자취생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나무 판자들을 직접 피스로 박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조립할 때에도 손목이 나가는 줄 알았던 녀석이다.
분해는 조립의 역순이기 때문에
역시나 손목이 미친듯이 돌아가서 소주 한 잔 들 때에도 손이 후달거렸다.
고단한 날이다 싶을 때엔
광주에서 맛난 걸 포장하여 시골집으로 퇴근 후 쐬주 한 잔에 똬아아악!!!!
근데 또 막상 혼자 먹고 마시면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혼자 먹고 마실 땐 정신 자체는 피곤하진 않는데
그것 참 알 수 없네.
수 많은 짐을 옮기고 거의 마지막 단계로
카메라 관련 물품을 전부 옮겼다.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건 역시 제습함인데,
무게는 다행히도 가벼워서 그리 어렵진 않았다.
문제는 카메라와 렌즈 등을 조심스럽게 옮겨야 한다는 점인데,
그간 쟁여두었던 뽁뽁이와 신문지들을 활용했다.
역시 쟁여두길 잘했어...
이때가 정말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느낀 순간이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왜 자꾸 뭐가 계속 나오는지.
혼자 이사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여전히 적응 안 된다.
나는 역시 가만히 정착해서 사는 삶이 좋고 느낀 순간 22592458번째.
광주 집에서 시골집으로 모든 짐을 쏟아내듯이 옮겼기 때문에
한 번은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심지어 2층 방에 모두 부려놨었는데
다시 1층 작은 방으로 옮겨야 할 일이 생겨서
이참에 더 빡씨게 분류도 하고 정리도 해봤다.
사실 여기 보이는 것은 2/3 정도이고,
1/3은 주방용품이기에 시골집 주방이 아주 난장판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고생을 좀 했다. 엄마 미안.)
이젠 정말로 화물차로 옮길 것들만 남긴 상태이다.
그랜저가 아무리 크고 넓다 하더라도
승용차로써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큰댁에서 포터를 직접 내가 끌고와서 옮길까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도와주셨다.
(정확히는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분)
이렇게 광주에 있던 모든 짐(연구실 개인 짐 포함)을 시골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별 일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인데,
사실을 낮엔 일하고 밤엔 퇴근하여 땀 한 됫박씩 흘려댔다.
파워에이드를 두 통씩 사서 마셔도 소변이 안 마렵더라.
그와중에 목 아픈 것 때문에 약도 먹고 병원도 다니고...
이건 그냥 내가 자초한 고생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워낙 남에게 뭘 부탁하려하지 않고
혼자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내 일이고 내 문제니까 내가 직접 해쳐나가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커서.
남 도와주는 건 괜찮지만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좀 어려운 편이긴 하다.
전형적인 호구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그냥 맘이 불편하달까.
적당히 남에게 기대도 괜찮을텐데 싶기도 한데,
행동으로 잘 이어지진 않더라.
갑자기 뭔 헛소리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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